슬로우 데미지 번역입니다
오역이나 오타가 있을 수도 있는데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Friday, November 15th
11:41 p.m.
루스트
여느 때처럼 「루스트」의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느릿한 리듬의 BGM을 들으면서 토와는 카운터석에 앉았다.
오늘은 손님이 적고 점장도 여유로운 것 같다. 레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휴일일 것이다.
[루스트 점장]
「어서 와」
[토와]
「위스키, 록으로」
카운터 안에 있는 점장이 음료를 만들기 시작하여 바로 호박색 액체가 흔들리는 잔이 눈앞에 놓인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목구멍으로 흘러가는 알코올의 여운을 즐기고 나서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을 때 점장이 이쪽을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물어보듯이 고개를 기울이자 점장은 카운터 안쪽에 앉아있는 남자 쪽을 돌아봤다.
[루스트 점장]
「기다리던 『euphoria』가 왔어」
점장의 부름에 남자가 튕기듯이 고개를 든다.
[루스트 점장]
「토와군, 그가 『프레이즈』야」
「프레이즈」……「루스트」의 블로그에 실려 있는 상처 화상의 투고자.
토와는 남자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약간 눈을 크게 떴다.
……이쿠이나.
클리닉으로 꽃을 배달하러 온 꽃집 점원 이쿠이나다.
이쿠이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서 큰 종이봉투와 자신의 잔을 들고 토와의 옆자리로 이동해왔다.
순간 맡아본 적 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이 냄새는…….
[이쿠이나]
「……안녕하세요」
[토와]
「……설마, 너였을 줄은」
토와의 말에 점장이 두 명의 얼굴을 번갈아 비교해본다.
[루스트 점장]
「혹시 아는 사이?」
[이쿠이나]
「아, 네, 조금」
[루스트 점장]
「놀랐다니까. 그런 우연이 있다니」
[이쿠이나]
「정말이요」
이쿠이나가 수줍어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토와에게로 주뼛주뼛 시선을 향한다.
[이쿠이나]
「저도 놀랐습니다. 설마……, 저기」
[토와]
「토와면 돼」
[이쿠이나]
「……토와 씨」
확인하듯이 반복하고 이쿠이나가 미소 짓는다.
[이쿠이나]
「동경하던 『euphoria』가 토와 씨였을 줄은」
[토와]
「동경? 내 그림을 알고 있는 건가」
[이쿠이나]
「네. 토와 씨의 그림, 정말 좋아합니다」
토와를 바라보는 이쿠이나의 두 눈에 뜨거운 빛이 비친다.
[이쿠이나]
「처음 봤을 때 너무 감동받아서 움직일 수 없게 돼버려서……한눈에 반했습니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었습니다」
[이쿠이나]
「말만으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심장에 꽂히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토와]
「허풍이 심하군」
[이쿠이나]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그린 사람과 사실은 이미 우연히 만났었을 줄은……운명이란 건 굉장하군요」
운명이라는 말에는 수상쩍음밖에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토와는 위스키를 마신다.
[토와]
「나도 블로그에서 네 작품을 봤어. 그 화상은 진짜 상처가 아니잖아?」
토와의 말에 이쿠이나가 웃으면서 눈을 내리깐다.
[이쿠이나]
「그렇습니다. 그건 꽃을 사용한 겁니다」
[토와]
「꽃?」
[이쿠이나]
「네. 꽃을 으깨서 모양을 가지런히 한 후, 화상 처리 소프트로 조금 가공했습니다」
꽃…….
이쿠이나는 꽃집에서 일하고 있다. 상품이 되지 않는 꽃도 있을 테니 소재는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꽃을 상처로 바꿔 만들겠다는 발상은 좀처럼 나오는 것이 아니다.
[토와]
「꽃을 상처로 보이게 하려고 한 이유는?」
[이쿠이나]
「그건……」
이쿠이나가 주저하듯이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린다.
토와는 손가락으로 집고 있던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고 나서 입가에 대고 깊이 들이마셨다.
이쿠이나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긴 침묵에 시선을 향하자 이쿠이나는 토와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토와]
「……신경 쓰여?」
뜨거운 시선을 받는 손을 훌쩍 움직인다. 이쿠이나가 깜짝 놀란 듯이 토와를 봤다.
[이쿠이나]
「아, 죄송합니다……! 저, 그만」
[토와]
「아냐. 상처인가?」
토와는 지렁이가 기는 것 같은 상처가 남은 손등을 내민다.
이쿠이나가 다시 빨려 들어가듯이 토와의 손을 본다.
[이쿠이나]
「……토와 씨. 이, 상처는」
단서 입수 : 상처
[토와]
「손만이 아냐. 몸에도 있어」
토와는 코트 소매를 걷어 올려 팔을 노출시켰다.
옥죄인 갈색 상처가 무수히 꿈틀거리는 피부에 이쿠이나의 눈이 그대로 못 박힌다.
이쿠이나를 둘러싼 자주색 연기가 짙게 물들었다.
[이쿠이나]
「어째서, 이렇게」
[토와]
「좋아하니까」
[이쿠이나]
「난도질하는 것을?」
토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쿠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혐오의 색은 없다.
[이쿠이나]
「……토와 씨」
이쿠이나가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든다.
[이쿠이나]
「저기, 부탁이 있습니다. 토와 씨……『euphoria』는 그림 모델을 모집하고 있죠」
[토와]
「아아」
[이쿠이나]
「저를 모델로 삼아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이쿠이나가 절실한 시선을 토와에게 향한다.
[토와]
「안 돼」
토와는 쌀쌀맞게 대답한다.
[토와]
「그림은 내가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린다. 지금의 너에 관해서는 그런 생각이 없어」
[이쿠이나]
「……그렇군요, 아쉽네요」
이쿠이나는 노골적으로 낙담했지만 기대하듯이 토와를 봤다.
[이쿠이나]
「그래도, 지금의 저에 관해서라는 것은, 언젠가는 그려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군요」
[토와]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전혀 모르지만.
[이쿠이나]
「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괜찮으면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겠습니까?」
이쿠이나는 겉보기와 달리 의외로 참을성 있게 버티는 타입인 것 같다. 그 눈에 강한 빛이 반짝인다.
[토와]
「아아」
토와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이쿠이나는 의표를 찔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쿠이나의 요청을 승낙한 것에 특별한 이유는 없고 연락처 따위 누군가한테 알려져도 상관없다.
서로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교환한다.
[이쿠이나]
「감사합니다. ……그렇지, 혹시 괜찮으면」
이쿠이나가 발밑에 뒀던 종이봉투를 들어올린다.
꺼낸 것은 한 송이의 꽃……푸른 꽃이었다.
[이쿠이나]
「이거, 푸르지만 장미입니다. 예쁘죠? 상품이 되지 않는 꽃을 가게에서 가져와서, 조금 상처가 있지만요」
토와가 푸른 장미를 받자 이쿠이나는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쿠이나]
「오늘은 만나뵙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감사합니다」
[토와]
「그거, 압생트인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듯이 토와는 이쿠이나의 잔을 턱을 가볍게 치켜 올리며 가리킨다.
이쿠이나가 당황한 듯이 자신의 잔을 봤다.
[이쿠이나]
「아, 네.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토와]
「전에 점장이 줬으니까. 좋아하는 거냐?」
[이쿠이나]
「네. 토와 씨는 어떻습니까? 압생트」
[토와]
「싫지 않아」
[이쿠이나]
「그렇군요. 그럼, 또 다음번에 느긋하게 마시죠」
이쿠이나는 잔의 나머지를 쭉 들이키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토와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계산대 쪽으로 향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는 이쿠이나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토와는 마시다 만 자신의 잔을 기울였다.
술을 꿀꺽 삼키자마자 점장이 토와에게 살피는 시선을 향한다.
[루스트 점장]
「어땠어, 그이」
[토와]
「그럭저럭」
[루스트 점장]
「모델로서는?」
[토와]
「별로야」
[루스트 점장]
「그렇구나, 아쉽네. 그래도, 그 화상의 작가니까. 어쩌면 바뀔 수도 있겠네?」
[토와]
「……그럴지도」
짧게 대답하고 토와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문득 카운터에 놓인 푸른 장미를 본다.
그 꽃잎은 가게 안의 조명에 채색되어 혈관 같은 알록달록한 무늬처럼 보였다.
「루스트」를 나온 후 토와는 약간 비틀거리면서 클리닉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도중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왠지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건물이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 인기척은 없다.
차의 주행음이 가까워지다가 곧바로 멀어져간다.
……기분 탓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Saturday, November 16th
1:35 a.m.
토와의 작업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TV의 잡음을 흘러들으며 소파에 앉아 크로키장에 연필을 휘갈겼다.
일심불란하게 그리는 것은 꽃이다.
「루스트」에서 이쿠이나에게 받은 푸른 장미.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왠지 갑자기 그리고 싶어졌다.
이유는 모른다. 다른 색이라서 자극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보통 사물보다 사람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풍경이나 무기물은 거의 그리지 않는다.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그림에 관하여 구체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싶다」라는 충동에 휩싸일 때에 붓을 든다.
언제 그렇게 된 건지는 자신도 모른다.
단서 입수 : 꽃
때때로 손을 멈추고 푸른 장미를 관찰하면서 생각한다.
꽃은 생물이다. 섬세하고 부드러운데다 살아가기 위한 양분을 필요로 하며 죽으면 썩어서 말라버린다.
전체적으로 동그스름함을 띠우며 으스러뜨리면 액체가 떨어진다.
지금까지 꽃을 찬찬히 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관찰하면서 그려보니 꽃을 고집하는 「프레이즈」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얇고 촉촉한 감촉의 꽃잎은 마치 피부 같다. 표면을 달리는 줄기는 모세혈관과 비슷하고 방울져 떨어지는 수분은 혈액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장미는 붉은 꽃잎인 것이 대부분이다. 붉은색을 정열적이라고 한다면, 푸른색은 냉담해지는 건가.
푸른 꽃잎의 의미…….
[토와]
「…………」
토와는 연필을 놓고 휴대폰을 잡았다.
이전에 레이가 말했던 꽃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분홍색 거베라가 「숭고미」고 빨간 제라늄은 「당신이 있는 행복」.
푸른 장미에도 꽃말이 있나 싶어서 검색해본다.
……있다.
원래 푸른 장미는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가능」이라는 꽃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발에 성공하여 「꿈이 이루어지다」라는 꽃말로 변경된 것 같다.
「불가능」에서 「꿈이 이루어지다」로.
문득 이쿠이나의 기뻐 보이는 얼굴을 생각해낸다.
「euphoria」의 그림을 좋아해서 동경했다고 말했었다.
이쿠이나의 심경에 비유하자면 「꿈이 이루어지다」라는 꽃말은 맞다.
[토와]
「…………」
손에 든 푸른 장미를 바라본다. 꽃잎이 약하게 피어있고 잎도 시들기 시작했다.
코를 가까이 대자 이상한 냄새가 났다. 장미 향기에 은은하게 섞인 변형된 냄새.
소재는 꽃이다. 사람 손으로 간단히 꺾이는 목숨.
만약 이 꽃이 의식과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면 최후에 무엇을 말할까.
토와는 푸른 장미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천천히 움켜쥐었다.
손 위에서 찌그러진 새파란 덩어리.
어둠 속에서 보는 그것은 마치 썩어가는 심장 같다고 생각했다.
……붉은 빛이 흔들리고 있다.
하늘하늘 큰 꽃잎처럼 흔들리고 있다.
빛은 흐릿하여 눈에 맺힌 눈물 너머로 보는 광경 같다.
자신은 앉아있다.
무릎을 안고서.
바로 옆에 무릎을 꿇고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이 난다.
나긋나긋한 손이 뻗어와 뺨에 닿았다.
그 손에 이끌리듯이 고개를 든다.
붉은 빛이 강렬한 역광이 되어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부드러운 어조로 뭔가 말을 걸고 있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살짝 뺨을 어루만진다.
그 손은 부드럽고 섬세하며……
슬퍼질 정도로 차가웠다.
Saturday, November 16th
9:58 a.m.
토와의 작업실
익일.
오늘의 교대 근무는 오전 타임이었는데 토와는 접수 시작 시간 직전에 눈을 떴다.
타쿠도 매일 아침 꼭 깨우러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시간에 일어난 것은 나름 훌륭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접수가 시작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토와는 간신히 1층으로 내려갔다.
접수 카운터 안에는 토와 대신으로 아리무라가 앉아있고, 째려보면서 교대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을 소화하며 머지않아 점심시간이 되어갈 무렵.
[이쿠이나]
「안녕하세요」
조용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바구니 같은 것을 든 이쿠이나가 서있었다.
[이쿠이나]
「……어제는 감사했습니다」
이쿠이나가 기쁜 듯이 눈을 가늘게 하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토와]
「……고마워」
이쿠이나의 인사에 영향을 받은 듯이 토와도 가볍게 인사를 돌려준다.
[이쿠이나]
「『무라세 클리닉』으로의 배달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쿠이나는 손에 들고 있는 바구니를 토와에게 보여주듯이 비스듬히 기울였다.
바구니 안에는 보라색 꽃이 늘어서있다.
[토와]
「……또 익명인가?」
[이쿠이나]
「네」
이쿠이나가 죄송하다는 얼굴을 한다.
이걸로 익명으로 꽃을 받은 것은 세 번째다.
토와는 일어나서 이쿠이나에게서 꽃이 든 바구니와 전표를 받았다.
코끝을 이상한 냄새가 스친다. 이전에도 맡아본 적 있는 냄새다.
순간 「루스트」에서 마셨던 압생트를 생각해냈다. 하지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 다르다.
[이쿠이나]
「아, 사실은 오늘, 진찰도 부탁드릴까 싶어서 온 겁니다」
[토와]
「진찰?」
[이쿠이나]
「네. 부상을 입어버려서」
이쿠이나가 왼팔 소매를 걷어 올린다. 흰 붕대가 살짝 보였다.
[토와]
「구른 건가?」
[이쿠이나]
「단단한 줄기를 자를 때 손이 미끄러져서, 가위에 긁혀버려서」
[토와]
「여기에 진찰받으러 온 건 처음인가?」
[이쿠이나]
「네」
토와는 꽃바구니를 카운터에 두고 클립보드에 끼워둔 초진용 기입 용지와 펜을 내밀었다.
[토와]
「이 종이에 기입해줘」
이쿠이나가 클립보드를 받아서 빈 의자에 앉아 기입을 시작한다.
그때 레이가 복도에서 걸어왔다.
오늘은 레이의 교대 근무는 들어있지 않지만 딱히 예정이 없다는 이유로 도와주러 와있었다.
[레이]
「어라? 뭐야 그 바구니……것보다, 설마」
[토와]
「아아」
레이가 꽃바구니를 끌어당기며 눈살을 찌푸린다.
[레이]
「또 익명 희망하는 분에게서 온 거네. 이걸로 세 번째……」
[레이]
「어쩌면 내원했을 때 자신이 보낸 꽃을 장식해둔 걸 보고 기뻐서, 라고 느끼고 계속 보내는 걸까」
[레이]
「꽃은 이쁘지만」
쓴웃음 지으면서 레이가 바구니의 내용물을 바라본다.
[레이]
「이 꽃, 팬지네. 정말 이쁜 보라색. 어디보자, 꽃말은……」
[레이]
「분명히……사려 깊음이나 깊은 생각, 그런 느낌이었으려나?」
[레이]
「팬지는 더 로맨틱한 꽃말이었던 것 같은데, 토와, 알고 있어?」
[토와]
「그럴 거 같냐?」
[레이]
「그렇구나」
[이쿠이나]
「……당신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자 클립보드를 든 이쿠이나가 서있었다. 기입을 끝낸 것 같다.
토와와 레이의 시선을 받자 이쿠이나가 약간 쑥스러운 듯이 웃는다.
[이쿠이나]
「죄송합니다. 보라색 팬지의 영어 꽃말입니다. 얘기가 들려서 그만」
[레이]
「이런, 깜짝 놀랐다구. 사랑 고백이라고 생각해버렸잖아. 그래도 바로 꽃말이 나오다니, 역시 꽃집 점원이네」
[이쿠이나]
「그런……」
레이에게 칭찬받자 이쿠이나가 수줍어한다.
토와는 바구니에 들어있는 보라색 꽃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으로 인해 가슴이 벅차다.
보라색 팬지의 꽃말.
거베라……숭고미.
제라늄……당신이 있는 행복.
세 가지의 꽃말을 나란히 놓고 보면 실로 정열적인 의미다.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고 있는 것 같은.
익명을 희망하는 환자가 보내는 꽃. 그 꽃말은 모두 의미심장하여 지금 바로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우연이라는 한 마디로 정리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토와]
「…………」
시선을 느껴서 토와는 고개를 든다.
이쿠이나가 곧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루스트」에서 만났을 때처럼 꽤나 열이 깃든 시선으로.
그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은은한 붉은 기를 띠며 하늘하늘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꽃을 보낸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이쿠이나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쿠이나 이외에는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거베라, 제라늄, 팬지.
전부 이쿠이나가 배달하러 왔다.
이쿠이나에게서 받은 푸른 장미를 생각해낸다.
푸른 장미의 꽃말은 꿈이 이루어지다.
[이쿠이나]
「……이거, 부탁드립니다」
이쿠이나가 토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기입이 끝난 용지를 끼워둔 클립보드를 내민다.
불과 몇 초, 말없이 시선이 얽히며 토와는 클립보드를 받았다.
[레이]
「이쿠이나 씨, 진찰 받는 거에요?」
[이쿠이나]
「네. 조금 부상을 입어버려서」
[레이]
「이런 싫어라, 괜찮아요? 호명될 때까지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요」
[이쿠이나]
「네」
[레이]
「그럼, 꽃은 맡아둘게요」
레이가 전표와 꽃이 든 바구니를 팔로 안고 복도를 걸어간다.
컴퓨터 모니터를 마주하면서 토와는 아직 이쿠이나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루스트」에서 이쿠이나와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해낸다.
확증 따위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감이 그렇다고 고하고 있었다.
호명되어 진찰실에 들어간 이쿠이나는 10분 정도 후에 대합실로 돌아와 안쪽의 긴 의자에 앉았다.
……보고 있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토와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이쿠이나가 이쪽을 보고 있다.
눈치 채지 못한 척을 하며 작업을 하다 보니 이쿠이나의 계산 차례가 되었다.
[토와]
「……이쿠이나 씨. 이쿠이나 타카시 씨」
이쿠이나가 일어나서 접수대 앞으로 걸어온다.
고개를 든 토와에게 이쿠이나는 뜨거운 시선을 쏟아냈다.
[토와]
「1070엔입니다」
[이쿠이나]
「……토와 씨」
이쿠이나가 계산용 접수대 위에 지폐와 동전을 놓으면서 거의 숨소리 같은 목소리로 계속 말한다.
[이쿠이나]
「사실은 오늘, 작품을 만들려다가 실패해버린 겁니다. 이거……」
그렇게 말하며 이쿠이나는 셔츠 위로 왼팔을 문질렀다.
[이쿠이나]
「꽤나 깊이 벌어져버렸는데, 흉터가 남으려나. 토와 씨처럼」
작품을 만들려다가 실패했다. 그것은 「프레이즈」로서의 말일 것이다.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 치곤 이쿠이나의 목소리는 기뻐 보이는 울림을 띠고 있다.
마치 흉터가 남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루스트」에서 만났을 때도 이쿠이나가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을 토와는 생각해낸다.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탐내는 눈빛으로 보였다.
이쿠이나는 상처에 흥미가 있을 것이다.
그게 본심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
대부분의 사람은 표면적인 퇴폐에 취했을 뿐인 경우가 많다. 자신에게 가장 흥미 없는 족속이다.
이쿠이나는 어느 쪽일까.
[토와]
「조심하길」
계산을 끝내고 토와는 굳이 차가운 목소리로 고했다.
[토와]
「그리고, 꽃은 필요 없어」
이쿠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숨을 삼키고 바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 등을 바라보면서 확신한다.
익명으로 꽃을 보낸 사람은 이쿠이나다.
그 꽃말은 전부 「euphoria」……자신을 향한 것일 거다.
그 방식에는 성가심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본래라면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은 타입의 사람이다.
하지만, 바로 이쿠이나를 잘라버리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쿠이나는 「프레이즈」……그 상처의 화상을 만든 작가다.
그림의 소재로서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한 소망을 캔버스에 그려내는 것이 「euphoria」다.
어쩌면 자신의 취향으로 바뀔 가능성도……없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상태를 보기로 했다.
……익명 희망하는 꽃의 배달은 보라색 팬지를 마지막으로 딱 멈췄다.
이쿠이나도 「프레이즈」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프레이즈」는 「루스트」의 블로그에 신작을 대거 투고했다.
게재된 화상은 이전보다 선명하고 강렬해져 있었지만, 어딘가 감칠맛이 없어진 인상을 받았다.
토와는 그것을 좋은 경향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거절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면 바뀔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쿠이나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동안은 여느 때처럼 나태한 나날이 계속됐다.
그 날, 토와가 낮이 지나서까지 얕은 잠을 헤매고 있자 방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면서 타쿠가 뛰어 들어왔다.
[타쿠]
「토와, 일어나. 도와줘!」
오늘은 교대 근무가 들어있지 않았던 것 같지만, 타쿠의 상태로 보아 긴급 사태인 것 같다.
토와는 몸단장을 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Saturday, November 23rd
12:15 p.m.
무라세 클리닉 진찰실
진찰실에 들어가자 남자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서 신음하는 깡패]
「으윽, 젠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레이]
「만지면 안 돼요, 얌전히 있으세요」
신음하고 있는 것은 싸구려의 화려한 셔츠를 입은 깡패다.
괴로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으며 셔츠의 복부가 붉게 물들어 있다.
[타쿠]
「교대하자」
[레이]
「아, 자, 선생님이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환자의 곁에서 상처의 상태를 보고 있던 레이가 안심한 것처럼 뒤로 물러나고 타쿠가 치료를 시작한다.
[레이]
「아리무라군은 지금 접수에 들어갔으니까」
레이가 토와 옆에 서서 귓속말을 한다.
[토와]
「나보다 아리무라가 이쪽에서 도와주는 게 좋지 않나」
[레이]
「지금 그 할아버지에게 잡혀서 빠져나올 수 없어. 토와는 대응할 수 없잖아?」
레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계산 시 매번 약의 상세정보를 묻고 싶어 하는 환자에 관한 것이다.
진찰 시에 타쿠가 설명했었지만 의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아서 토와에게도 몇 번인가 물고 늘어진 적이 있다.
[타쿠]
「……상처가 꽤나 깊군. 데스매치인가?」
타쿠가 남자의 셔츠를 열어 상처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관찰한다.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으으, 그렇지만, 엄밀하게는 좀 다르달까……」
[타쿠]
「그렇다면?」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데스매치에서 엄청 당해서 에리어 밖으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도중에 한계가 와서 길가에 자빠졌어요」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있어서……」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그래서 나를 팬 놈이 쫓아왔다고 생각해서 도망가려고 했는데, 엄청 배가 아파서 움직일 수 없어서 배를 보니……」
[타쿠]
「베인 상처가 있었다, 고」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네. 정말,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요. 일어나보니 배가 베여있고 피는 멈추지 않는데다 아프고……패닉에 빠져버렸어요」
타쿠가 지시를 내리면서 치료를 해간다. 토와는 레이와 함께 타쿠를 도왔다.
[타쿠]
「……자, 끝났다」
타쿠가 치료를 끝내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선다.
[타쿠]
「진통제와 항생제를 처방해줄 테니 꼭 전부 복용해주세요」
[치료를 받는 데스매치 참가자]
「네……」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는 아직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지만 제법 안정된 것 같다.
타쿠가 토와와 레이에게 눈짓을 하여 진찰실을 나간다.
토와도 레이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타쿠]
「어제랑 그저께도 만취해서 밖에서 자다가 부상을 입었다는 환자가 왔거든」
[레이]
「최근 많구나. 고상한 여신이었나? 묘하게 소문이 난 거」
[타쿠]
「그건 간호하는 쪽이지. 이번에는 말하자면 칼로 베는 악마군」
레이가 의아한 얼굴이 된다.
[레이]
「에, 그럼 고상한 여신은 칼로 베는 악마에게 당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는 거야?」
[타쿠]
「전원이 동일인물에게 당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 모방범죄일 경우도 있고」
[타쿠]
「그리고 매번 고상한 여신이 때마침 지나가서 치료해주는 것도 아니잖아」
[레이]
「그건 분명 그렇지만……토와 때는 치료를 받았었지?」
[토와]
「아아」
[레이]
「치료를 받은 사람은 전원 의식을 잃은 사이에 부상을 입었다……」
[레이]
「전부 동일인물이 아닐 가능성은 있지만, 부상과 치료가 세트로 묶인 패턴이 확실히 있어」
[레이]
「그래도, 그거 이상하지 않아? 치료받은 사람 모두 기억에 없는 부상을 입었잖아?」
[레이]
「기억에 없다는 건 의식을 잃은 동안 상처가 생겼다는 거야」
[레이]
「그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부상을 입은 사람이 고상한 여신 같은 사람에게 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없는 걸까」
[타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신의 구체적인 목격 정보가 나돌았겠지」
[레이]
「그치?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못 들었어. 그렇다는 건, 어쩌면……」
[레이]
「정신을 잃은 후 부상을 입히는 사람과 치료를 하는 사람이 한패라던가?」
[타쿠]
「역시 그건 생각이 지나치잖아. 애당초 왜 그런 걸 할 필요가 있는 거지」
[레이]
「그건 모르겠는데……뭔가 목적이 있거나」
[타쿠]
「난처하구만」
[레이]
「그러게……. 음~」
레이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고 토와 일행은 진찰실로 돌아왔다.
치료를 받은 남자가 돌아간 후 토와는 레이와 함께 도구의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레이]
「고상한 여신과 칼로 베는 악마……. 토와는 어떻게 생각해?」
계속 그런 것을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었던 건지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레이가 토와 쪽을 본다.
[토와]
「글쎄」
[레이]
「정말, 조금이라도 생각해봐. 네 몸에 일어난 일이잖아」
[토와]
「그렇게 말해도」
[레이]
「정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가 타는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봉하려고 한다.
그때 봉지에서 변색된 꽃의 줄기를 튀어나오듯이 들여다봤다. 이전에 접수대의 꽃병에 꽂혀있던 꽃이다.
[레이]
「……그러고 보니, 익명을 희망하는 분의 꽃, 안 오네」
[토와]
「아아」
레이가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단단히 봉한다.
[레이]
「이쿠이나 씨도 전혀 안 보이고. 익명 환자에게서 꽃이 연속으로 왔을 때는 어쩌나 싶었는데……」
[레이]
「막상 안 오니 그건 그것대로 좀 쓸쓸하네」
[토와]
「제멋대로군」
[레이]
「정말이지. 이쿠이나 씨, 요즘 드물게 순박한 청년이라 은근히 마음의 위안이 됐었는데. ……아」
레이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로 토와를 본다.
[레이]
「이쿠이나 씨가 일하고 있는 꽃집에 가면 잘 지내는지 어떤지 알 수 있잖아」
[토와]
「그렇지」
[레이]
「토와, 갔다 와」
[토와]
「왜 내가」
토와는 노골적인 불만을 담은 눈으로 레이를 본다.
[레이]
「가본 적 있잖아?」
[토와]
「장소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잖아」
[레이]
「이건 내 육감인데……」
레이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미소를 짓는다.
[레이]
「이쿠이나 씨는 토와에게 흥미 있었잖아. 진찰 받으러 왔을 때도 토와를 계속 보고 있었고」
[토와]
「…………」
꽤나 예리하다고 생각하면서 토와는 입을 연다.
[토와]
「그 녀석은 『프레이즈』다」
[레이]
「프레이즈? 뭐야 그게」
[토와]
「『루스트』의 블로그에 실렸잖아, 상처 화상」
[레이]
「아아, 응. 그 리스트 컷 화상 같은 거」
[토와]
「그 화상의 작가야」
[레이]
「……에?! 거짓말!」
레이가 소리치다가 당황한 듯이 입을 다문다.
[레이]
「잠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토와]
「『루스트』에 그 녀석이 왔을 때 점장이 소개해줬어」
[레이]
「그랬어?! 좀 더 빨리 알려주라구」
작은 목소리로 계속 말하고 나서 레이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레이]
「어라, 그럼 이쿠이나 씨는 원래 『루스트』를 알고 있었다는 거야?」
[토와]
「아마도. 『euphoria』의 그림을 좋아한대」
[레이]
「에, 그래? 그럼 역시 이쿠이나 씨, 토와를 맘에 들어 한 거잖아」
자기 뜻대로 됐다는 표정으로 레이가 토와에게 검지를 들이댄다.
[레이]
「그럼 더욱이 토와가 꽃집에 가는 게 좋아」
[토와]
「……어떨까」
[레이]
「왜? 토와도 그 상처 화상, 신경 쓰였잖아?」
[토와]
「클리닉에 익명으로 꽃을 보낸 건 이쿠이나야」
[레이]
「……뭐?」
레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인다.
[레이]
「그래?」
[토와]
「아마도」
[레이]
「만약 정말 이쿠이나 씨가 보냈었다면, 갑자기 배달을 멈춘 건 왜일까」
[토와]
「꽃은 필요 없다고 말했거든」
[레이]
「뭐, 언제?」
[토와]
「이전에 그 녀석이 왔을 때」
[레이]
「필요 없다니……. 보냈던 게 이쿠이나 씨인지 어떤지, 아직 확실히 모르는데도?」
[토와]
「거의 틀림없이 그 녀석이야」
[레이]
「그래도, 확정된 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말을 해버린 거야?」
[토와]
「실제로 안 오잖아」
어리둥절하던 레이의 표정이 서서히 분노로 변해간다.
[레이]
「……토와. 그거, 사과하고 오는 게 좋겠어」
[토와]
「사과?」
[레이]
「이쿠이나 씨는 토와의 그림을 좋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뿌리치는 말을 들으면, 꽃을 본인이 보낸 게 아니라도 충격 받을 거야」
[레이]
「토와가 어떤 식으로 말했을지 대충 짐작이 가는걸」
[레이]
「게다가, 만약 정말 이쿠이나 씨가 꽃을 보냈다면, 더더욱 나쁜 짓을 한 거야. 익명이라서 놀랐지만 별로 나쁜 것도 아니고」
[레이]
「전부터 말했는데 토와는 다른 사람에게 흥미가 너무 없다구. 그래서 그렇게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히는 거야」
[토와]
「그래도, 그 녀석은……」
말을 꺼내려다 토와는 말을 멈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쿠이나에 관해서 자세히 말해볼까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다고 다시 생각한다.
[레이]
「그 녀석은, 뭔데?」
[토와]
「아냐」
[레이]
「어쨌든 제대로 사과하고 와. 연락처 같은 거 몰라?」
[토와]
「알고 있어」
[레이]
「그럼 당장이라도 연락할 수 있잖아. 직접 만나서 사과하는 거야. 안 그러면 『루스트』 출금 시켜버린다?」
[토와]
「…………」
「루스트」를 출금당하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레이라면 진짜 할 수도 있다.
왜 레이가 그렇게까지 화내는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타인에게 흥미가 없는 자신의 언동에 이전부터 화가 쌓여있던 것일 거다.
솔직히 이쿠이나의 모습은 조금 신경 쓰였기 때문에 마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토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서 먼저 휴대폰으로 이쿠이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음이 울릴 뿐이었기 때문에 전화를 끊고 몸단장을 한 후 밖으로 나왔다.
맑은 하늘 아래 꽃집을 향하여 밝은 길을 느릿느릿 걷는다.
Saturday, November 23rd
2:08 p.m.
꽃집 로제
머지않아 이전에도 방문한 적 있는 통유리로 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이쿠이나의 모습은 없다.
문을 당겨서 안으로 들어가자 여성 점원이 다가왔다.
[로제의 여성 점원]
「어서 오세요. 뭔가 찾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토와]
「이쿠이나 씨는」
[로제의 여성 점원]
「이쿠이나군은 결근입니다. 당분간 쉰다고 연락이 왔었어요」
[토와]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짧게 답하고 바로 가게를 나온다.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은 집에 틀어박혀서 작품 제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코트 포켓에서 휴대폰을 꺼내 할 말이 있다는 메시지를 이쿠이나에게 송신한다.
이후는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조금 어슬렁거리다가 술이라도 마실까 싶어서 토와는 번화가로 발길을 돌렸다.
Saturday, November 23rd
3:22 p.m.
코우오우 거리
아직 해가 뜬 상태로 걷는 번화가는 밤보다 빛이 바래 보인다.
평소 어둠 속에 뒤섞인 건물이나 길의 얼룩이 백일하에 드러나 실제로는 이런 건가 하는 감상을 보는 이에게 안겨준다.
그런 바래서 허예진 큰길을 걷고 있자 뭔가가 시야의 구석에서 꿈틀거렸다.
어스레한 뒷골목에서 흔들리는 그림자.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날이 밝았는데도 기분이 달아올라 그 행위에 미치려고 하는 걸까.
지나치려다가 신음소리 같은 것이 귀에 들어와 걸음을 멈춘다.
다시, 낮은 남자의 목소리. 헐떡이기보다는 고통스런 신음으로 들린다.
흥미가 생겨서 토와는 골목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에게 또 다른 한 명의 남자가 올라타 있다.
올라타 있는 남자는 양팔을 머리 위로 들고 있고, 그 손에 쥔 뭔가가 번쩍이며 느릿하게 빛을 반사한다. 나이프인가.
토와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가자 지금 막 나이프를 내리치려던 남자가 튕기듯이 일어났다.
그리고, 쏜살같이 골목 안쪽으로 뛰어나갔다.
잔향인가. 뭔가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발소리가 탁탁 멀어져가는 가운데 지면에 쓰러져있는 남자가 낮게 신음한다.
자세히 보자 남자 주위에 띄엄띄엄 뭔가가 떨어져있다. 작은 약병 같은 것과 특이한 모양의 나이프다.
나이프는 전체적으로 커브를 그리며 굽은 쪽이 칼날이 되어 있다.
토와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지면에 쓰러져있는 남자의 상태를 관찰했다.
남자는 의식이 몽롱한 듯이 약하게 손발을 움직이고 있다. 약을 먹였을 것이다.
달려서 도망간 남자가 자유를 빼앗아 나이프로 찌르려고 했던 건가.
길가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사이에 부상을 입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약을 먹고 나이프에 찔릴 뻔했다.
토와는 지면에 떨어져있는 약병과 나이프를 잡았다.
나이프는 접이식이며 칼날을 넣고 나서 약병과 함께 코트 포켓에 넣는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쓰러져있는 남자의 의식은 돌아올 것이다. 달려간 남자 쪽에 살의는 없다.
왜냐하면……
달려간 남자에게서 난 그 냄새.
무슨 냄새인지 알고 있다.
토와는 일어나서 골목을 되돌아 나왔다.
Saturday, November 23rd
4:17 p.m.
E특구 주택가
토와가 향한 곳은 이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 고층 맨션이었다.
방 호수는 1403.
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타서 14층에서 내린다.
복도를 걸어 문패에 1403이라고 적혀있는 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에 얼굴을 대서 실내의 상태를 살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집주인이 부재라는 법도 없다.
토와는 문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당겼다.
[토와]
「…………」
당연하지만 잠겨있어서 열리지 않는다.
토와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코트 포켓에서 철사를 꺼냈다.
끝 모양을 약간 구부려 열쇠 구멍에 꽂는다.
자물쇠 따기는 타카사토구미에 있었을 때 철저히 배웠다.
빚 추심 시 집에 없는 척 하는 『부채자』의 대책이라는 것이었지만, 역으로 협박하는 쪽이 많아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직감에 따라 철사를 움직이고 나서 반응이 있던 곳에서 뽑아낸다.
일어나서 다시 문손잡이를 잡았다.
열린 문 안으로 재빨리 들어가 손을 뒤로 하여 닫는다.
복도에는 이전처럼 관엽 식물이 죽 늘어서있다.
신발을 신은 채로 복도를 걸어 막다른 곳의 문을 연다.
낯익은 거실로 나왔다.
벽 옆에 빽빽이 놓인 관엽 식물, 자신이 잠들어있던 침대.
그리고, 실내에 가득 찬 독특한 냄새.
방의 광경은 이전과 다름없었지만 크게 다른 것은 관엽 식물이 거의 다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복도에 늘어서있는 식물도 시들어 있었다.
바닥에는 작업을 하던 도중에 내던진 듯이 흩어진 꽃잎과 전정가위, 나이프, 원예용품이 어질러져 있다.
토와는 골목에서 주운 접이식 나이프를 코트 포켓에서 꺼내 칼날을 꺼냈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나이프와 비교해본다. 같은 형상이다.
다만, 바닥의 나이프에는 희미하게 검붉은 얼룩이 달라붙어있다.
특이한 모양의 나이프가 연속으로 발견되는 우연 따위 그리 없을 것이다.
토와는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의 칼날을 넣고 다시 코트 포켓에 넣었다.
바닥에 놓인 가정용 구급상자 옆에서 그림도구 같은 물방울이 조금씩 떨어져 있다.
물방울은 끈적함과 붉은 기를 띠고 있다. 혈액일 것이다.
바닥에서 침대로 시선을 옮기자 꾸깃꾸깃 둥글게 말린 모포 위에 뭔가 희고 얇은 것이 섞여있는 것이 보였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이 붕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잠들어있던 때의 일을 생각해내면서 토와는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테이블 위에는 뭔가의 잔해가 놓여있다. 처음에는 썩은 고깃덩어리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잔혹하게 찌부러져 거무칙칙하게 변색되어 있는 것은 낯익은 것이었다.
테이블로 다가가 잔해를 관찰한다.
「루스트」의 블로그에 실렸던 상처 화상과 흡사하다.
꽃을 상처로 보이게 한 「프레이즈」의 작품이다.
역시, 이 방의 주인은…….
풍기는 냄새는 아까 골목에서 달려간 남자에게서 풍긴 것과 같다.
[토와]
「…………」
토와는 천천히 입술을 미소 짓듯이 일그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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